본문 바로가기

(23)
꽃의소묘 - 김춘수 꽃의 소묘 / 김춘수 1 꽃이여, 네가 입김으로 대낮에 불을 밝히면 환히 금빛으로 열리는 가장자리, 빛깔이며 향기며 花紛이며...... 나비며 나비며 축제의 날은 그러나 먼 추억으로서만 온다. 나의 추억 위에는 꽃이여, 네가 머금은 이슬의 한 방울이 떨어진다. 2 사랑의 불 속에서도 나는 외롭고 슬펐다. ..
vogue야 - 김수영 VOGUE야 김 수 영 VOGUE야 넌 잡지가 아냐 섹스도 아냐 唯物論도 아냐 羨望조차도 아냐---羨望이란 어지간히 따라갈 가망성이 있는 상대자에 대한 시기심이 아니냐, 그러니까 너는 羨望도 아냐 마룻바닥에 깐 비니루 장판에 구공탄을 떨어뜨려 탄 자국, 내 구두에 묻은 흙, 변두리의 진흙, 그런 가슴의 죽..
구슬픈 육체 - 김수영 불을 끄고 누웠다가 잊어지지 않는 것이 있어 다시 일어났다 암만해도 잊어버리지 못할 것이 있어 다시 불을 켜고 앉았을 때는 이미 내가 찾던 것은 없어졌을 때 반드시 찾으려고 불을 켠 것도 아니지만 없어지는 자체(自體)를 보기 위하여서만 불을 켠 것도 아닌데 잊어버려서 아까운지 아까웁지 않..
사걀의 마을에 내리는 눈 - 김춘수 사걀의 마을에 내리는 눈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던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
타령조1 - 김춘수 타령조(打令調) 1 / 김춘수 사랑이여, 너는 어둠의 변두리를 돌고 돌다가 새벽녘에서 그리운 그이의 겨우 콧잔등이나 입 언저리를 발견(發見)하고 먼동이 틀 때까지 눈이 밝아 오다가 눈이 밝아 오다가, 이른 아침에 파이프나 입에 물고 어슬렁어슬렁 집을 나간 그이가 밤, 자정(子正)이 넘도록 돌아오..
타령조3 - 김춘수 타령조 3 / 김춘수 지귀야, 네 살과 피는 삭발을 하고 가야산 해인사에 가서 독경이나 하지. 환장한 너는 종로 네거리에 가서 남녀노소의 구둣발에 차이기나 하지. 금팔찌 한 개를 벗어 주고 선덕여왕께서 도리천의 여왕이 되신 뒤에 지귀야, 네 살과 피는 삭발을 하고 가야산 해인사에 가서 독경이나 ..
능금 - 김춘수 능 금 - 김춘수 - Ⅰ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Ⅱ 이미 가 버린 그 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 날에 머문 이 아..
도취의 피안 - 김수영 도취의 피안 김수영 내가 사는 지붕 위를 흘러가는 날짐승들이 울고가는 울음소리에도 나는 취하지 않으련다 사람이야 말할 수 없이 애처로운 것이지만 내가 부끄러운 것은 사람보다도 저 날짐승이라 할까 내가 있는 방 위에 와서 앉거나 또는 그의 그림자가 혹시나 떨어질까 보아 두려워하는 것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