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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 공방 자료

카라밧지오

 

 카라밧지오(Michelangelo Merisida Caravaggio) (1573년 ~ 1610년 7월 18일) 

 

 

 

본명은 Michelangelo Merisi.

1571(?) 밀라노(?)~1610. 7. 18 토스카나 포르테르콜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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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그가 주로 사용한 혁신적인 명암법은 바로크 회화의 주요특징이 되었다. 그는 종교적인 주제를 이상적으로 표현하는 전통을 경멸하고 거리에서 소재를 취해 그것들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성 마태오를 주제로 한 3점의 그림(1597경~1602, 로마 산루이지데이프란체시 교회)은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뒤이어 〈엠마우스에서의 만찬 The Supper at Emmaus〉(1596~98)과 〈동정녀 마리아의 죽음 Death of the Virgin〉(1605~06)과 같은 걸작들을 그렸다.

초기생애

 

카라바조는 카라바조 후작의 집사 겸 건축가인 페르모 메리시의 아들이었다. 11세 때 고아가 된 카라바조는 바로 그해에 화가인 밀라노의 시모네 페테르차노 밑에 도제로 들어갔다. 이미 그림의 기본기를 갖추고 있었던 그는 1588~92년 로마에 갔다. 그는 이상화된 피렌체 회화에 반대하여 자연과 일상적인 사건들을 묘사하는 쪽에 더 가까운 양식을 발전시킨 롬바르디아 및 베네치아 회화 양식을 열심히 연구하여 그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젊은시절 그는 밀라노에서 로마까지 여행하면서 도중에 파르마·볼로냐·피렌체·아시시 등지에 머물렀던 것이 확실한데, 그 과정에서 볼로냐 출신의 혁신적인 당대 화가인 카라치가(家)의 작품들 및 마사초와 조토의 초기 걸작들을 보았다. 카라바조는 이것들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색채와 분위기를 있는 그대로 나타내 생생한 느낌을 주던 밀라노 시기의 기법은 선을 더욱 뚜렷하게 그림으로써 억제되었으며, 형식적인 구도에서는 가장 평범하고 수수한 주제들에서 볼 수 있는 사실적 표현이 더욱 강화되었다. 1590년대초 로마의 미술계에서는 미켈란젤로가 확고한 위치에 있었으며, 지적으로는 활기 차고 열정적인 반종교개혁기의 막을 올린 트리엔트가 지배하고 있었다. 로마는 명예와 부를 좇아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가난한 미술가들을 포함해서 온갖 방문객들로 넘치는 활기 찬 도시였다. 카라바조는 외국인들이 모여 사는 캄포 마르초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과일바구니 Basket of Fruit>

 
 

처음 5년은 불안정하고 굴욕스러운 고통의 시기였다. 그의 전기를 쓴 작가들에 따르면, 카라바조는 잡일을 해서 생활비를 벌었으며 어떤 스튜디오에서도 몇 달 이상 머물지 못했다. 마침내 1595년경 독자적으로 일을 하기로 결정하고 마에스트로 발렌티노라는 상인을 통해 그의 그림들을 팔기 시작했는데, 그 상인이 가져간 카라바조의 작품은 교황궁에서 유력한 고위성직자인 프란체스코 델 몬테 추기경의 주목을 끌었다. 카라바조는 곧 델 몬테의 후원을 받게 되었으며 그의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델 몬테의 후원을 받기 전까지 카라바조는 정신적·물질적으로 곤궁한 상태에서도 40여 점의 작품을 그렸다. 그 가운데에는 야심작도 상당수 있는데 그것들은 매우 획기적인 회화적 발명으로서 카라바조의 무질서하고 방탕한 일상생활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우아하고 고상한 솜씨와 명확하고 적절한 표현을 보여주고 있으며 개인 수집가들을 위한 작품들이었다. 각각의 구도에는 회화에 대한 카라바조의 철저한 태도가 뚜렷이 나타나 있다. 특히 이 초기의 그림들은 '꽃을 그리는 것은 인물을 그리는 것에 못지않게 매우 어려운 일이며', '뛰어난 화가는 자연의 사물을 잘 그릴 수 있다'라는 그의 신념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다. 〈과일 바구니 Basket of Fruit〉에서는 화려하고 사실적으로 그려진 과일들이 밀짚 바구니 안에 균형 있게 배치되어 있으며 시각적으로 인상적인 구도를 이루고 있다.

로마에서의 주요작품

 

이 작품들을 계기로 사실적 표현양식이 전통적인 양식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카라바조의 사실적 자연주의가 처음으로 완전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콘타렐리 예배당에 있는 성 마태오의 생애를 주제로 한 작품들에서이다. 카라바조는 1597년에 로마의 산루이지데이프란체시 교회에 있는 콘 타렐리 예배당의 장식을 의뢰받았는데, 델 몬테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일로 그는 24세의 나이에 중요한 후원자와 고객들에게 '저명한 화가'(pictor celeberrimus)로서 명성을 얻었다. 이 일은 성 마태오의 생애에서 따온 장면들로 이루어진 3편의 대형 그림들, 〈성 마태오와 천사 St. Matthew and the Angel〉·〈성 마태오의 소명 The Calling of St. Matthew〉·〈성 마태오의 순교 The Martyrdom of St. Matthew〉를 포함하는 엄청난 작업이었다. 이 3점의 그림에서 카라바조는 성인전기(聖人傳記)의 전통에 따른 삽화적 방식 대신에 불온한 사회적 태도에 영향을 받은 극적인 사실주의를 채택했는데, 이것들이 발표되자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마 카라바조는 결국 공개적으로 자신의 폭넓은 변화를 드러낼 수 있는 이러한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들에서 그는 구도와 주제의 표면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예술성 자체, 즉 시간과 빛의 느낌도 새롭게 시도하고 있다. 

 

카라바조가 회화적 혁신에서 사용한 수단은 빛이 다. 그의 작품에서는 선과 색에 못지않게 빛이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그것이 작품의 구도를 결정하고 있다. 20세기의 미술평론가인 로베르 롱기는 카라바조가 빛을 사용한 것의 중요성을 르네상스 시기에 원근법이 발견된 것의 중요성에 비유했다. 그의 빛은 자연의 그것이 아니다. 그것은 위에서, 거의 언제나 구경꾼들의 어깨 지점에서 가득 쏟아지는 신비한 빛이며, 색의 체계를 변화시켜 피부의 변색현상처럼 색의 미묘한 변화를 없애버리고 그리하여 색조를 단순하고 매우 어둡게 만드는 연극무대에서 사용하는 것 같은 그런 빛이다. 콘타렐리 예배당의 장식은 1602년경에 완성되었다. 카라바조는 당시 30세도 채 안 되었지만 당대의 모든 화가들을 능가했다. 개인이나 교회 모두 그에게 많은 그림을 주문했다. 그가 예술적으로 절정기에 이르렀을 때 그려진 이 그림들의 일부는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산아고스티노 교회를 위해 그린 〈성모와 순례자들 Madonna with Pilgrims〉·〈로레토의 성모 Madonna di Loreto〉는 전경의 무릎 꿇고 있는 '더러운 발과 남루한 모자' 차림의 두 노인으로 말미암아 상당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동 정녀 마리아의 죽음〉은 동정녀의 평범한 얼굴 생김과 벌거벗은 다리, 물에 빠진 여자처럼 배가 불룩한 모습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동정녀를 모욕했다고 해서 카르멜회 수도사들에게 거절되었다. 이 그림은 루벤스의 권유로 1607년 4월에 만토바의 공작이 구입했으며 만토바로 옮겨지기 전에 1주일 동안 로마에서 화가들에게 전시되었다.

성숙한 양식의 절정기

 

미술가들과 학식 있는 사람들 및 진보적인 고위성직자들은 카라바조의 거칠고 난잡한 미술에 들어 있는 미묘하고 신비한 함축적 의미에 매혹되었지만, 교회의 공직자들은 전통적인 화가들의 자기방어적인 과민성과 보수적인 성직자 및 많은 대중들의 본능적인 저항을 반영하여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카라바조가 받았던 여러 가지 비난이 그의 성공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그의 명성과 수입은 늘어났으며, 그는 다른 화가들의 부러움을 사기 시작했다. 초기 로마 시기의 절망적인 방랑생활이 끝나고 그는 추기경과 왕자들의 사교계에 발을 들여 놓았지만 여전히 성급하고 방탕한 성격을 버리지 못했다. 초기 로마 시기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콘타렐리 예배당의 장식 이후 카라바조는 여러 차례 걸쳐 법을 위반했다. 1600년 한 동료 화가는 폭력 사건으로 그를 고발했으며, 그 다음해에는 한 군인에게 부상을 입혔다. 1603년 또다른 화가의 고소로 투옥되었다가 프랑스 대사의 중재로 가까스로 풀려났다. 1604년 4월 그는 급사의 얼굴에 아티초크 접시를 던진 사건으로 고발되었으며, 10월에는 로마 수비대에게 돌을 던진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1605년 5월 그는 무기를 잘못 사용해 체포되었으며, 같은 해 7월 29일에는 애인을 지키려다가 한 남자를 다치게 하는 바람에 한동안 로마를 떠나 있어야만 했다. 그뒤 1년도 지나지 않아 1606년 5월 29일에 카라바조는 다시 로마로 돌아왔으나 테니스 경기중 점수 때문에 심한 다툼을 벌이다가 라누초 톰마소니라는 사람을 죽이고 말았다. 

 

카라바조는 자신도 부상을 입은데다가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결과에 겁을 먹고 초조한 상태에서 그 도시를 피해 카라바조 후작의 한 친척이 소유하고 있는 근처의 영지로 피신했다. 그뒤 그는 다른 은신처로 옮겨다니다가 결국 1607년초 나폴리에 도착했다. 그는 한동안 나폴리에 머물면서 플랑드르의 화가인 루이 팽송을 위하여 〈로사리오 기도중의 성모 Madonna of the Rosary〉를, 몬테델라미세리코르디아 예배당을 위하여 그의 후기 걸작들 중 하나인 〈은 총을 주제로 한 7편의 작품 The Seven Works of Mercy〉을 그렸다. 이 그림의 어둡고 절박한 분위기는 틀림없이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있었을 그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또한 그의 회화양식의 변화를 처음으로 나타내고 있다. 1607년말(또는 1608년초)에 카라바조는 몰타 섬을 여행하여 그곳에서 유명한 미술가로서 환영을 받았다. 그는 열심히 일을 하여 여러 작품을 완성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곳의 교회를 위해 그린 〈세례 요한의 참수 The Beheading of St. John the Baptist〉였다. 1608년 7월 14일 카라바조는 몰타 수도회에서 '정의의 기사'로서 인정을 받았지만, 그뒤 곧 그가 저지른 죄에 관한 소문이 몰타에 퍼지고 다시 죄를 저지르는 바람에 그 수도회에서 쫓겨나고 투옥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탈출했다.


카라바조는 시칠리아로 피신하여 1608년 10월에 시라쿠사에 도착했으나 추격받을 것이 두려워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여전히 명성이 따랐으며, 그리하여 시라쿠사에서 그는 산타루치아 교회를 위하여 후기의 비극적인 걸작인 〈성녀 루치아의 매장 The Burial of St. Lucy〉을 그렸다. 1609년초에 그는 메시나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나사로의 부활 The Resurrection of Lazarus〉·〈목자들의 경배 The Adoration of the Shepherds〉를 그렸으며, 그뒤에는 팔레르모로 피신하여 그곳의 산로렌초 예배당을 위하여 〈성 프란체스코와 성 라우렌티우스의 경배 Adoration with St.Francis and St. Lawrence〉를 그렸다. 카라바조가 도망을 다니면서 가장 어려운 역경에서 그린 작품들 중에는 그의 전 생애에서 가장 뛰어난 구도의 작품들이 몇 점 들어 있다. 구도는 예전보다도 더욱 웅장하지만, 이 작품들은 예전의 그림들에서 볼 수 있는 직접적인 묘사보다 미묘한 감정 표현과 부드러운 색조로 훨씬 더 강렬한 느낌을 준다. 그를 괴롭혔을 것임이 틀림없는 산란한 정신상태를 고려할 때 이 차분하고 강렬한 작품들이 지니고 있는 뛰어난 작품성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의 필사적인 도주는 오직 교황의 사면으로만 끝날 수 있었는데, 카라바조는 1609년 10월 그가 다시 북쪽의 나폴리로 거처를 옮겼을 때 로마에서 그를 위하여 중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불운이 그를 덮쳐 그가 어떤 여관 문앞에서 공격을 받아 심한 부상을 입고 죽었다는 소문이 로마에 퍼졌다. 회복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1610년 7월 배를 타고 교황령 안의 스페인 속령인 포르테르콜레로 갔으나 잘못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가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는 이미 자기를 로마에 데려다줄 배가 자신의 물건을 싣고 이미 떠난 뒤였다. 불행과 극도의 피로가 겹친 데다가 열병이 재발해서 더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그는 떠나가는 배를 보며 바닷가에 쓰러진 후 며칠 뒤 37세도 안 된 나이로 죽고 말았다.

평가

 

카라바조는 당대의 가장 혁신적인 미술가로 평가된다. 그는 이전 1세기 동안 미술을 이끌어온 인간적·종교적 경험을 이상적인 형태로 나타내는 플라톤식 이상을 버리고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으며, 인생은 언제나 일종의 드라마이고 모든 경험(심지어 신비한 경험조차)은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물리적 현상 속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매우 감정적이고 반항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현상세계에서 일어나는 실제 사건들의 의미를 철저하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작품에서 극적인 순간을 뛰어나게 묘사할 수 있었는데, 실제로 그의 그림들은 순간을 포착한 극적 긴장감을 자아내고 있다. 그의 인간관은 당시에는 독특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널리 칭찬을 받고 그의 기법이 널리 모방되기는 했지만 그는 외로운 인물이었다.


<출처 : 브리태니커/L. Carluccio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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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표지
ⓒ 평단

2000년 하순. 저자 김상근은 16세기말 중국 명나라에서 활동했던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리치를 연구하기 위해 로마의 예수회 고문서 보관실에서 조사를 하던 중 우연히 카라바조의 작품을 발견한다. 그로부터 저자는 카라바조의 그림을 직접 보기 위해 세계 여러 나라의 미술관을 돌아다녔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카라바조에 빠져들게 만들었던 것일까.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 16세기 이탈리아의 화단을 주름잡았던 천재화가. 기존 화풍의 틀을 깨는 파격적인 기법과 독창적인 해석으로 기존 화단에 새 바람을 몰고 왔던 인물. 현재 이탈리아에서는 화폐에 등장할만큼 유명한 예술가로 추앙받고 있으나 우리에게는 너무나 생소하고 낯선 이름이다.

이 책 <이중성의 살인미학 카라바조>는 16세기 이탈리아 미술계에 한 획을 그었던 카라바조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카라바조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 국외에 비해 국내에서는 그의 이름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형편.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국내의 미술학도는 물론이고 미술애호가들에게도 카라바조의 작품세계를 안내하는 훌륭한 길라잡이 역할을 해준다.

이 책은 카라바조의 생애를 크게 무명시절, 카라바조 일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델 몬테 추기경을 만난 시기, 종교화가로 널리 이름을 날리던 시기, 살인을 저지르고 도주하던 시기로 나뉘었다. 그리고 각각의 시기에 해당되는 작품과 그 태동배경, 작품의 특징을 설명해놓았다.

가장 속된 것에서 성스러움을 찾다

당시의 종교화는 천군천사가 등장하고 예수나 성모마리아와 같은 성서의 주인공들은 무조건 성스럽고 아름답게 표현되는 등 속된 것과는 거리가 먼 고귀하고 성스러운 것들로 표현되었다. 우리에게도 낯익은 미켈란젤로, 틴토레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들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카라바조는 단 한번도 그러한 종교화를 그리지 않았다. 그는 당시의 매우 일상적인 풍경들과 평범한 사람들을 성화의 주인공으로 삼았다. 어쩌면 지극히 평범하달 수도 없는 뒷골목 매춘부, 건달, 협잡꾼들이 성화의 주인공이 되었으니 당시 종교계가 받은 충격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속된 것을 성스러운 것으로 승화시킨 카라바조의 작품은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카라바조는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가리켜 ‘저 사람들이 모두 나의 스승’이라 했다. 성과 속이 따로 없다는 의미였다. 성안에 속이 있고 속안에 성스러움이 가득했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은 성스러움과 속됨을 동시에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카라바조 예술의 위대한 점은 속에서 진정한 성을 발견하고 성을 저 높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관점이 아닌 우리가 사는 세속적인 차원으로 끌어내렸다는 데 있다."(348쪽)

카라바조의 후기 종교화를 보면 섬뜩한 느낌이 든다. 살인, 죽음, 광기가 도처에 깔려있다. 대부분 성서 속의 순교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아무리 순교라지만 죽음의 그림자가 깔린 작품의 분위기는 살벌하고도 괴기한 구석이 있다. 이에 대하여 저자는 어떠한 평을 내렸을까.

"카라바조의 종교화속에 깃든 살인미학은 16세기 카톨릭교의 반종교개혁적인 시대정신을 담고 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래 개신교에의 유혹에 흔들리는 교인의 마음을 성서에 등장하는 성자들의 확고한 믿음과 순교의 전례를 통해 각성시키려하고 있다. 그러나 카라바조는 카톨릭 교회가 요구하는 반종교개혁적인 시대정신에 머물러있지 않았다...성서를 단순히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으로 해석하지 않고 있다."(344쪽)

죽음 본연의 실체에 접근하다

순교에 직면한 순교자의 인간적인 모습을 부각시켰다는 의미이다. 괴로워하는 순교자, 찡그리거나 두려움에 떠는 순교자의 모습을 표현했으며 아울러 고난을 당하는 예수의 모습에서도 그의 신성을 강조하기 보다는 고통스러워 몸부림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함으로써 카라바조는 인간으로서의 ‘죽음’ 본연의 실체에 접근했다. 그는 죽음을 종교적으로 미화하는 화가가 아니었다. 


카라바조의 작품이 당시의 종교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만큼 작품제작의 뒷배경이 된 종교, 사회적 분위기를 상세하게 소개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도운 저자의 노력이 한껏 느껴진다. 저자는 종교개혁이 발생했던 당시의 상황과 이에 맞선 카톨릭 교회와의 갈등 하에 탄생된 카라바조의 종교화들을 섬세하면서도 예리하게 분석하고 해석했다. 여기에는 신학을 전공한 저자의 약력이 한몫했다.

인간 내면에 감춰진 추악함을 드러내다

카라바조의 작품세계는 테네브리즘으로 일괄 요약할 수 있다. 테네브리즘은 명암의 극적인 대비를 특징으로 하는 17세기 양식으로 화면의 태반이 어두운 색조로 표현되고 간접광으로 인해 밝은 색조로 묘사된 형태와 날카롭게 대비되는 것이 특징이다.

카라바조의 거의 모든 작품이 이 테네브리즘으로 표현되어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 테네브리즘은 그가 추구했던 성스러움과 속됨, 죽음의 주제를 표현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장치이기도 했다.

"이것이 카라바조의 그림이 지닌 힘이다. 그는 종교를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동시대 카톨릭교회가 요구하는 반종교개혁적인 시대정신을 담아낼 수 있었고 동시에 지극히 개인적인 시각에서 인간의 내면세계를 조망하는 위대한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카라바조 종교화에서 볼 수 있는 살인미학은 바로 우리 내면에 감추어져있는 추악함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346쪽)

책의 분량이나 성격면으로 봤을 때 비전공자가 보기에는 다소 부담스럽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150여 점이 넘는 도판과 상세한 해설, 각주, 인용문 등으로 인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6세기 서양사나 종교에 대해 사전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이해가 빠를 것이다. 또한 저자의 설명이 아닌 독자들이 직접 보고 감상할 수 있는 카라바조의 작품과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들이 풍부히 소개되어있어 감상의 묘미를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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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 포토 보기

 

드라마 |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독일 | 180 분 |

 

            

 

 

 

 

 

 

 

 

Caravaggio / 이탈리아(1571~1610)

  


 

 
나르시스
 (초기작품으로 추정)

 

    

 

 

 

 바커스(Bacchus)

 

걸핏하면 화를 내고, 사람을 칼로 찌른적이 있을만큼 다혈질이었던 카라바지오는

그의 절친한 친구 카라치와 함께 당시의 매너리즘 회화에 신물이 나있었습니다.

그는 추한것을 회피하는 카라치와 달리 추한것을 회피하는 것은 경멸할 만한 약점으로 보았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The Stigmatization of Saint Francis)

 

그가 원하는것은 진실. 즉 그가 본 그대로의 진실이었습니다.

그는 고전적인 규법을 좋아하지 않았고. "이상적인 아름다움" 이라는것도 별로 그렇게 탐탁치 않았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The Stigmatization of Saint Francis) - Detail

 

그는 인습을 타파하고, 미술에대해 아주 새롭게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감상자에게 충격을 주려하고 아름다움과 전통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호로페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딧(Judith Beheading Holofernes)

 

그는 당시 이와같은 비난속에 작업했으며, 당시 그에게 쏟아진 비난은 "자연주의자 naturalist" 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연주의자란말이 욕이 되는 시대가 바로 바로크 시대였던 것입니다.

  

  

 

 

 

 

성 마테오를 부르심(The Calling of Saint Matthew)
 

그러나 사실 카라바조는 그런일에 시간을 빼앗길 겨를도 없이 분주하게 작업하였습니다.

그는 자연주의, 즉 우리가 그것을 추하다 고 생각하던 아름답다고 생각하건 간에

자연을 충실하게 모사하려는 그의 시도는 오히려 아름다움만 강조하는 카라치보다 깊은 신앙심의 발로였을 것 입니다

 

 

  

 

 

 

의심하는 성 토마(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

  

우선 이 그림을 보면, 성 토마스를 비롯한 세사람의 사도들이 예수의 옆구리를 손으로 찔러보고 있고,

그들의 표정은 놀라움에 가득합니다,

아울러 그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거룩한 사도들의 모습은 없고 오직 나이든 늙은 노동자들의 풍상을 겪은 얼굴입니다,

이 그림이 당시에 어떤 충격을 주었을 지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카라바조는 이렇게 말했을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토마스에게 한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또 네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라는

성서의 말씀을 기억하라고 말입니다. 

예수 스스로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확인을 시키는 구절입니다,

당시 노동자 출신의 늙은 사도들이 부활을 의심하는 이 장면이 정상일까요?

거룩하고 근엄한 표정의 사도들이 찬양의 눈빛으로 머리에 후광이 그려진 예수의 손을 만져보는 그림이 자연스럽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카라바조의 자연주의 입니다,

 

  

 

 

 

 

성 바오로의 개종(The Conversion of Saint Paul)

  

그는 성서를 되풀이해서 읽으면서 그 구절을 곰곰히 생각해 보앗을 것입니다.

그는 조토와 뒤러처럼 성서의 이야기들도 마치 이웃집에서 일어난 사건들처럼 그 자신의 눈앞에서 그려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십자가형을 당하는 성 베드로(The Crucifixion of Saint Peter)

  

그가 명암을 다루는 방법은 이러한 효과를 최대한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의 빛은 인체를 우아하고 부드럽게 보이게 보이기 위하 것이 아니라,

어둠과의 깊은 대조를 생겨나게하는 눈부시도록 번쩍이는 거센 빛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정복한다.(Amor Vincit Omnia)

  

사실 그의 그림을 당시에 정당하게 평가 할 수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는 시대를 너무 앞선 것입니다,

그의 그림은 19세기를 넘어 20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서 제대로 평가받기 시작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정복한다.(Amor Vincit Omnia) - Detail  

빛과 사실을 중시한 화가, 카라바조의 미술세계.. 어떻습니까?

 

 

   

 

 

영감을 받는 성 마테오(The Inspiration of Saint Matthew)

 

 

  

 

 

 

번제물로 바쳐지는 이사악(The Sacrifice of Isaac)

 

 

  

 

 

 

목이 베어지는 세례자 성 요한(The Decapitation of Saint John the Baptist)

 

  

 




성 마태오의 순교 The Martyrdom of St. Matthew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606년 / 성 예로니모 (또는 히에로니무스)

성 예로니모란 미술 작품 세계에 있어 금욕자, 학자, 의사로 자주 묘사되는 사림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예로니모는 사자와 함께 등장하는데

그것은 사자의 가시를 그가 빼어주고 사자가 이를 고마워해서 그를 계 속 쫓아 다녔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그림에는 사자대신 해골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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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사리오 기도중의 성모 Madonna of the Ros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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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년 / 세례요한의 참수

 

어떤 위안이나 구원의 느낌 없이 죽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가로폭이 무려 5미터가 넘는 거대한 작품입니다.

카라바조는 요한의 목에서 흐르는 피로 그림 하단에 서명을 했습니다.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다윗의 표정 확대사진

 

다윗의 슬픈 표정은 스스로 자신의 죄를 응징하는 카라바조의 슬픈 자화상이었다. 

다윗과 골리앗의 두 얼굴에서 자신이 지닌 삶과 죽음의 이중성,

종교가 지닌 폭력성을 동시에 표현하는'이중초상'을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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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ome with the Head of the Baptist(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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