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적 1.90㎢, 인구 5만 4666명(2001)이다. 서울특별시 중랑구에 속한 동이다. 중랑천과 묵동천이 동의 서쪽과 북쪽으로 있기 때문에 구내의 다른 동보다 수원(水源)이 풍부한 곳이다. 동쪽의 신내동, 서쪽의 성북구 석관동, 남쪽의 중화동, 북쪽의 도봉구 공릉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문방사우(文房四友)의 하나인 먹을 이곳에서 제조하였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면(忘憂里面) 묵동리(墨洞里) 지역이었다.
1914년에는 양주군 구리면(九里面) 묵동리였고, 1963년 서울특별시 동대문구에 편입되면서 묵동으로 바뀌었고, 1988년 중랑구 관할로 되었다.
법정동인 묵동은 행정동인 묵1·2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랑구 면적의 약 10%에 해당된다.
동을 이룬 옛 마을명은 먹골인데, 묵동3거리에서 묵동천과 봉화산의 북쪽 기슭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봉화산에서 자라는 소나무로 참숯을 만들어 먹을 제조했는데 품질이 좋아 궁중에 진상했다고 한다. 개울물이 까맣게 되었으므로 이 개천을 묵동천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먹골배 또는 묵골배라고 하는 배의 주산지로도 유명하다. 조선시대 문신인 왕방연(王邦衍)이 살던 마을을 왕방골이라고 하는데, 단종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으로 살다가 임종 때 유언으로 자신을 영월 가는 길에 묻어주고, 주변에는 배나무를 많이 심어 달라고 했다. 그의 무덤은 후손들에 의해 이장되었고, 그가 손수 심었다는 배나무가 자라 번식하면서 이 일대가 배밭이 되었다고 전한다.
우이천과 묵동천이 합류되는 지점의 중랑천은 마치 큰 바다와 같아서 이곳을 중랑포라고 했으며, 군사훈련장소로 이곳을 택했으므로 충심으로 나라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뜻에서 충랑포(忠浪浦)라고도 불렀다. 넓은 백사장에 물이 깊고 수량이 많아 충분히 배를 띄울 수 있었으며, 도강(渡江) 훈련도 가능한 곳이었다.
122번지 일대를 화랑마을이라고 한다. 1974년 이곳 마을 어린이 애향단에 대해 모범어린이 표창을 하면서 화랑정신을 이어받고, 주민들은 상호간에 친밀감을 갖자는 뜻에서 마을 이름을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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