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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

[스크랩] 문방사우 중 으뜸 벼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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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를 쓰기 위한 먹을 가는 용구인 벼루는 문방사우(文房四友)의 제일로 꼽힌다. 중국에서 발명되어 발달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쓰여졌다.
벼루의 종류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벼루의 재질에 따른 분류로 와연(瓦硯), 도연(陶硯), 석연(石硯), 옥연(玉硯), 목연(木硯), 석말연(石沫硯, 돌가루를 구워 만든다), 징니연(澄泥硯, 펄(泥)을 말리고 쪄서 만든다) 등이 있으며, 둘째, 원석의 산지에 따른 분류로 단계연, 흡주연, 남포연(충남 보령), 안동연, 해주연, 장수연(전북 장수군) 등 수많은 종류가 있다. 셋째는 벼루의 문양에 따른 분류로 용연(龍硯), 구연(龜硯), 봉황연(鳳凰硯), 학연(鶴硯), 매화연(梅花硯), 송연(松硯), 죽연(竹硯), 천도연(天桃硯), 하엽연(荷葉硯), 십장생연(十長生硯), 산수연(山水硯), 심자연(心字硯)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중국의 벼루는 뤄양[洛陽]에 있는 서주(西周) 때 묘에서 조색기(調色器)라 하는 직사각형의 석판(石板)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벼루의 발생을 알아보는 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조색기는 주(周)나라에서 한(漢)나라 때까지 만들어진 마석구(磨石具)로서, 석판 위의 안료를 갈아 으깨는 용구였다.
후베이성[湖北省]의 진(秦)나라 때 묘에서 발굴된 마석구가 딸린 판상(板狀)인 달걀모양 돌벼루에서 먹을 갈아 으깬 흔적이 발견되고 동시에 먹도 출토되었다. 이로써 먹을 주로 가는 조색기가 벼루로서 발전되어 가는 과정을 짐작할 수 있다. 벼루의 원형은 한 장의 연판(硯板)이었으며 먹물이 고이는 묵지(墨池)가 없었다. 딱딱한 먹을 직접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마석구를 사용해서 매우 작은 석묵을 갈아 으깼으며 옻이나 아교로 고착시켜 썼다. 벼루면이 한나라 후반에는 절구모양, 앞쪽에서 위쪽으로 향해 경사진 것, 초생달 모양으로 구분지은 것 등이 나타났으며, 딱딱한 먹을 갈기 위한 형태로 바뀌어갔다.
육조(六朝)에서 수(隋)·당(唐)나라에 이르자, 먹을 가는 묵당(墨堂) 둘레에 먹물을 모으는 묵지가 마련되었고, 벼루등[硯背]의 발도 한나라의 삼발[三足]에서 십발[十足]·십이발로 많아졌다. 또 이 무렵 풍자형(風字形)의 도자연(陶瓷硯)이 나타났다. 이것은 외형이 풍자형이고 안쪽은 절구모양이며, 벼루등쪽 바로 앞 좌우에 2발이 붙어 있다. 직사각형으로 묵지와 묵당이 앞뒤로 나뉜 현재의 벼루형태는 오대(五代)에서 송(宋)나라 때 나타났다. 송나라 때는 70가지를 넘는 벼루재료와 연식(硯式) 또는 제식(制式)이라는 100종 가까운 형태가 있었다. 중국벼루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으로 돤시벼루[端溪硯]와 서저우벼루가 있다. 돤시석은 당나라 초기에 발견되었고, 광둥성[廣東省] 가오야오현[高要縣]에서 산출되는 벼룻돌이다. 돤시석은 자색이 주로 많고 녹색·노란색·흰색·검은색의 색조가 있으며, 암석학상 휘록응회암(輝綠凝灰岩)에 속한다. 색조나 얼룩무늬의 변화가 많고, 마간색(馬肝色)·저간색(猪肝色)·양간색(羊肝色)·천청색(天靑色)·초엽백(蕉葉白)이라는 색조명칭과, 청화(靑花)·어뇌동(魚腦凍)·얼음무늬[氷紋]·금선(金線) 등의 얼룩무늬에 대한 명칭이 있다. 서저우석은 안후이성[安徽省] 우위안에 있는 푸룽강[芙蓉溪]일대에서 산출되는데, 당나라 현종(玄宗) 때에 발견되었다. 돌이 산출되는 범위가 넓고 종류도 많다. 그 중에서도 용미석(龍尾石)은 예로부터 귀중하게 여겨, 남당(南唐)에서 송나라 때까지 가장 좋은 벼루 재료로 쓰였다. 천매점판암(千枚粘板岩)은 청록색과 청흑색이 많고, 질이 굳고 치밀하다. 서저우석의 얼룩무늬에는 나무늬[羅紋]·수파무늬[水波紋]·금훈(金暈)·어자무늬[魚子紋] 등이 있다. 이 밖의 중국의 벼룻돌은 간쑤성[甘肅省] 린타오[臨] 방면에서 생산되는 타오허녹석[兆河綠石], 산둥성[山東省] 칭저우[靑州]에서 나는 홍사석, 만주 쑹화강[松花江] 방면에서 나는 녹석, 그리고 징니(澄泥) 등이 있다. 당나라부터 청(淸)나라 때에 만들어지고 미술공예로서의 가치가 높은 벼루를 고명벼루[古名硯]라 한다. 이러한 감상벼루[鑑賞硯]는 남당(南唐)에서 시작된 세연(洗硯) 취미에 의하여 애연가(愛硯家)·문인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이와는 달리 한국의 벼루는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도제(陶制)의 원형벼루가 만들어졌다. 삼국에서 모두 간소한 제각(蹄脚)이 달리고 뚜껑이 있는 백족연(百足硯)이 쓰였으며, 또한 석제원형벼루도 전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연지(硯池) 외벽과 발에 조각된 벼루도 나타났다. 석연(石硯)이 일반화된 것은 고려시대 이후로 보이며 《고려도경》에 의하면 <연왈피로(硯曰皮盧)>라 하여 이때부터 벼루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벼루는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흙을 빚어 만든 가야시대의 원형 도연(陶硯)이다.
보통 돌로 만드는데 충청남도 보령시(保寧市) 남포면(藍浦面)에서 나는 남포석을 가장 으뜸으로 쳤으며, 서유구의 『동국연품(東國硯品)』에 의하면 남포석은 금실무늬가 있는 것을 제일 상품(上品)으로 치고, 은실무늬가 있는 것은 중품(中品)으로 치며, 또한 화초무늬가 있는 것은 돌이 단단하고 매끄러운 편이면서도 먹을 잘 받고 엉기지 않아 가품(佳品)으로 친다고 하였다. 이 밖에도 평안북도 위원(渭原)의 청석(靑石), 고령(高靈)의 고령석, 평창(平昌)의 자석(磁石), 풍천(豊川)의 청석, 갑산(甲山)·무산(茂山)의 돌 등이 대표적 석연재(石硯材)이다. 크기는 서당연(書堂硯)처럼 큰 것부터 손가락만한 행연(行硯)까지 다양하다. 형태는 원형·사각형·육각형·팔각형·십이각형·타원형 및 귀연(龜硯)·연화연·태사연(太史硯)·금연(琴硯)·석고연(石鼓硯) 등 여러 가지 물체의 형태를 본뜬 것들이 있으며, 용·학·거북·봉황·매화·난초·국화·대나무·불로초·팔괘·십장생 등을 조각한 것도 있다.


편집부 / 벼루자료 : 벼루장 김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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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하늘을 보세요. 그 곳에 꿈이 ~
글쓴이 : 늪바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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