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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 자료

 한국의 역사 기록에 첨성대라는 명칭이 붙은 천문대는 적어도 세 개나 된다. 첨성대는 오늘날의 천문대와 같은 것이다. 첫 번째 첨성대는 고구려의 평양부에 있었던 것이고, 둘째는 유명한 신라 첨성대이다. 마지막으로 개성에 있는 고려 첨성대이다. 여기에서는 경주에 있는 신라 첨성대에 대해서만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신라의 첨성대


1. 신라 첨성대에 관한 옛 문헌

 경주에 있는 신라 첨성대에 관한 기록은 옛 문헌 여러곳에 남아 있다. 그 문헌의 종류에 따라 세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가 고문서에 해당하고, 둘째가 명사들이 신라 첨성대를 방문하고 옛날의 상상하며 지은 예술작품이다. 마지막은 근대 학자들의 연구 논문이다. 여기서는 첫째에 해당하는 고문서에 실려 있는 것 8개를 소개 하겠다.

(1)『삼국유사』: 선덕여왕 때(632~647) 건립

(2)『고려사』

(3)『세종실록』지리지 150: 5ㄱ

첨성대(瞻星臺). 부성(府城)의 남쪽 모퉁이에 있다. 당나라 태종(太宗) 정관(貞觀) 7년 계사(癸巳: 서기 633년에 해당한다)에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쌓은 것이다.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위는 방형(方形)이고 아래는 원형(圓形)으로, 높이가 19척 5촌, 위의 둘레가 21척 6촌, 아래의 둘레가 35척 7촌이다. 그 가운데를 통하여 사람이 올라가게 되었다.

(4)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卷 21 東 24ㄴ

전대(前代)의 흥망이 세월을 지났는데, 석대(石臺) 천척(千尺)만 하늘에 솟았네. 어느 사람이 오늘날 천상(天象)을 살핀다면 한 점(鮎) 문성(文星)·사성(使星)되었다 하리라.

(5) 『동경잡기(東京雜記)』 권1 고적(古蹟)

첨성대. (경주)부의 동남쪽으로 3리 떨어진 곳에 있다. 선덕여왕때 돌을 깍아 대를 만들었는데, 위는 네모나고 아래는 둥글다. 높이가 19척이나 되어 사람들은 그 속을 아래 위로 드나들면서 천문을 관측하였다.
(6) 『명사(明史)』 조선지(朝鮮紙) 권상 22

(『동경잡기』와 거의 같음)

(7) 『증보문헌비고』상위고 권2 의상1

(『동경잡기』와 거의 같음)

(8) 『증보문헌비고』여지고 권 37 궁실(宮室)

선덕왕 16년(647)에 첨성대를 만들었다(이하는 『동경잡기』와 거의 같음).

(9) 『경주 순창설씨 족보 세헌편과 경주 순창설씨 족보 이십년사 동사본전』

설총(薛聰)은 항상 백구정에서 놀았는데, 첨성대는 선덕왕이 지은 것이다. 이 대의 상층에 대 이름이 있는데, 크게 쓴 세 자는 공의 친필이다.

이 마지막 문헌에 있는 설총이 썼다는 세 글은 물론 '첨성대' 이다. 그런데 이 사실은 그 글씨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학계에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2.첨성대의 구조

 

 신라첨성대는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었다. 첫째는 기단이라고 부르는 부분인데 첨성대 천체를 받치고 있으나 그 밑부분은 흙 속에 묻혀 있다. 이 기단의 외부는 2단으로 깔아 놓은 12개의 판석으로 되어 있고, 천체 모양은 네모 반듯하다 오랜 세월에도 돌과 돌 사이에 서로 갈라진 틈이 보이지 않는 점으로 보아 돌의 길이가 충분히 길뿐만 아니라 폭도 넓어서 안쪽으로깊이 들어간 것 같다. 둘째 부분은 첨성대의 몸통에 해당한다. 기단에서 높이가 약 8m 까지 돌을 원통 모양으로 쌍아 올린 부분이다. 그 쌓은 모양이 너무 특이하다하여 어떤 사람은 중국이나 중동 지역의 것을 본따서 만든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와 똑같은 축조물이 중국이나 다른 지역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지적하지 못하고 있다. 유리병 모양으로 밑부분이 굵고 위로 올라가면서 가늘어 지는 이 독특한 모양은 신라인들의 창작이며 모방은 아니다. 기단위에 있는 제 1단의 둘레는 약 15.5mm인 원인데, 위로 올라 가면서 둘레는 조금씩 줄지만 돌의 두께는 거의 같다. 이렇게 돌을 제 12단까지 쌓아 올린 다음 제 13단에서 제 15단 사이에는 네모난 구멍을 만들었다. 이 네모난 구멍(약 95cm×95cm)은 rm 방향이 정남이 아니라 약간 서쪽을 향하고 있다. 이 구멍은 관측자들이 첨성대 꼭대기에 올라가기 위한 출입문이다. 다시 9단을 더 쌍아 올린 다음 제 25단과 26단에는 네 방향으로 밖을 향해 튀어 나온 돌이 있다.이 두 단은 마지막 단인 제 27단의 높이에 맞는 바닥돌을 언어 놓기 위한 지지대(대들보)인 동시에 몸통의 동들이 이완하지 않도록 하는 역할도 하기 위한 것이다.

 몸통은 기단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제 18단까지는 약간씩 가늘어 지다가 제 19단에이르면 거의 같은 둘레를 지키면서 27단까지 올라간다. 이 사이에 사용된 돌의 두께는 거의 같으나 길이는 약간씩 서로 다르다. 각기 밖으로 노출된 부분은 그 단의 둘에와 같은 곡율로 둥들게 다듬어져 있다. 마지막 제 27단의 둘레는 약 8.95m이며, 여기까지 쌓은 돌은 모두 365개에 이른다. 마지막으로 몸통위에 정자(井字) 모양을 한 꼭대기 부분이 있다. 이것을 눕혀 놓은 긴 돌이 2단으로 겹쳐진 부분이다. 정자 모양이라고 하는 이유는 가장 위에 있는 돌끝이 서로 물리면서 끝 부분이 약간 밖으로 뻗어 나와 있기 때문이다. 이 2단으로 눕힌 돌은 서로 벌어지지 않을뿐만 아니라 밑에 있는 몸통의 돌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무겁게 누르는 역할도 함께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장치야 말로 이 신라 첨성대가 1300여년 이라는 오랜 세월을 지내 오는 동안 지진으로 인한 지각변동이 여러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잘 견디어 올수 있었던 것이다.이 첨성대보다 약 700여년이나 뒤늦게 만든 조선의 광화방 관대의 윗부분이 서로 갈려져 틈이 생긴것과 견주어 보면 신라인의 건축술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첨성대 내부도 재미있는 구조를 이다. 우선 제 12단과 15단에 있는 출입구에 들어가보면 제 12단까지 그 밑은 흙으로 꽉 차 있다. 지금까지 이 흙을 파본 사람은 없는 것 같다. 한편 제 12단 위로는 속이 비어 있는 원통속과 같은데, 원통내부로 뻗은 돌들의 넓이가 각기 달라서 안에서 보면 들쭉날쭉하다. 따라서 좀 조심스럽기는 하나 이 돌들의 넓이가 각기 달라서 안에서 밟고 올라갈수 있도록 만든 것 같다. 제 26단까지 올라가면 위의 공간을 반쯤 덮고 있는 판석한장이 동쪽에 걸쳐 있다. 이 판석의 두께는 제 27단의 돌의 두께보다 약간 얇다. 따라서 이 판석은 제 27단의 돌들과 함께 작업할 장소로 사용된 것 같다.
첨성대의 출입구에 대해서 두가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그 첫째는 입구가 제 12단에 있기 때문에 너무 높다는 것이고, 둘째는 방향이 정남에서 약간 서쪽을 향했다는 점이다.
 첫 의문에 대한 해답은 간단하다. 관측자가 출입하는 데는 불편할지 모르지만. 낮에 일식을 비롯하여 날씨나 지변만을 관측하는 것이 아니고 밤에는 별을 관측해야 한다. 그런데 밤에는 사나운 들짐승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안전을 위한 조치였다. 조선 후기에 한양의 경복궁 앞에 호랑이가 나타난 일이 있었으니 삼국시대에는 더운 빈번했을 것이다. 제 12단에 출입구가 있다고 하는 것은 오르내리면서 1년의 달수를 마음에 새겨 두기 위함에서 였다.
 둘째 의문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출입구의 방향이 정남향이 아닌데 밑에 있는 기단이나 꼭대기에 있는 정자 모양의 돌의 방향과도 어긋난다. 건축하는 중에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어떤 의도가 삼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숨어 있는 의도란 무었일까? 첫째로 생각할수 있는 것은 그 출입구의 방향에 천문에 관계 있는 관서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관측 당번이관서 건물에서 출입하기 편하도록 입구를 만든 것이다.
 또 다른 추측이 가능한데, 그것은 선덕여왕은 밤에 관측자가 출입구에 켜둔 등불을 보고 열심히 일하는지이 여부를 확인 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등불을 켜 두는 이유는 관측자가 출입할 때 조명으로 필요했을뿐만 아니라 동물의 침입을 막는데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3. 첨성대의 기능

 이미 소개한 바 있는 조위의 시와 다음에 열거하는 『삼국사기』의 세 기록을 참조하여 생각해 볼 뿐 천문대로서의 기능을 분명하게 설명한 기록은 없다. 훌륭한 첨성대를 지어놓은 신라인이 첨성대의 기능과 업적을 체계 있게 기록하여 두지 못한 것은 그들의 잘못인가 아니면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의 착오였던가
 다음 『삼국사기』의 세 기록은 첨성대가 완성된 후 신라의 물시계와 이를 관장한 관원에 관한 것일뿐 첨성대의 기능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성덕왕 17년(718) 봄 정월에 누각(물시계)을 만들기 시작했다.

누각전 성덕왕 17년(718)에 박사 6인과 사 1인을 두다

경덕왕 8년(749) 봄 3월에 천문박사 1인 누각박사 6인을 두다.

 위와 같은 기록들이 직접적인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첨성대 아래서 물시계로 정확한 시각 측정을 하고 있는 동안 천문학자들은 첨성대 위에서 그들의 업무를 수행했었던 것임을 암시하는 내용들이라고 할 만하다. 즉 조위가 서술한 대로 규표로 해의 그림자의 길이를 재서 1년의 길이를 정하기도 하고 대와 달을 관찰하여 절기를 구별하는 일과 구름의 모양과 그 움직임을 보고 날씨를 살피고. 별을 관찰하여 국운을 점치는 일들이 짝을 맞춰 이루어 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관측 활동이 바로 맨눈으로 하늘을 관찰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시대의 첨단 과학이었다.


4. 신라 시대 첨성대에서 이룩된 업적

 중국이나 한국의 옛 기록은 오래된 것일수록 언제, 누가, 어디서 관측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지 않다. 이것이 아라비아나 유럽의 경우와 다른점이다. 그 이유는 아라비아와 유럽에서는 특출한 인물이 만든 개인의 업적인데 반하여, 중국과 한국은 황실(정부조직)에 속한 관원들이 수행한 것이여서 그 왕조의 역사서에 수록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는 삼국시대와 고려 시대에는 더욱심하다.
 이와 같은 이유로 첨성대에서 어떤 활동이 있었는가를 구체적으로 밝힐 방법은 없다. 신라 첨성대만이 아니라 그 후대의 것인 고려 첨성대와 조선 관상감 간의대에 경우도 사정은 꼭 같다. 조선의 경우는 해당 기관의 업무용 기록인 『성변측후등록』에 남기는 것으로서 족하다고 그들은 생각했었던 것이다.
 신라의 첨성대가 이룩한 업적을 찾는데는 간접적인 방법을 이용하면 가능해 진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백제와 더불어 신라의 천문관측기록이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음표는 삼국의 건국에서 첨성대가 건립된 647년까지의 약 700년간 관측한 9가지 천문현상과 지변이라는 현상이 기록된 수를 나라별로 조사한 것이다. 삼국중에 가장 건국이 늦은 백제가 최다기록(65개)을, 그 다음에 신라가 60개의 기록을 , 고구려가 49개의 기록을 각각 남김으로서 심국의 기록은 전부 합쳐서 174개이다 그런데 첨성대기 건립된 647년 이후부터 통일 신라가 멸망하기까지의 약 300년은 앞의 기간의 절반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신라 본기에 기록된 수만 하더라도 120개나 된다. 신라의 기록만을 보면 첨성대 건립으로 인하여 4배 이상이나 더 많은 기록을 남긴 셈이다.


 

현 상

-54~646년 사이

647~934년 사이

합계

참고

신라

고구려

백제

신라

고구려


1

2

3

4
 

5

 

6
 

7

 

8
 

9

 

10

 


일식

객성

혜성

유성
 

月淹犯五緯

 

五緯淹犯
 

五緯犯星

 

晝星見
 

日月變

 

地變

 


19

1

12

5
 

3

 

1
 

1

 

 
 

 

 

18

 


11

2

7

4
 

 

 

1
 

2

 

1
 

2

 

19

 


26

1

14

4
 

1

 

 
 

2

 

2
 

 

 

15

 


10

3

17

26
 

13

 

1
 

4

 

3
 

1

 

42

 

 
 

 

1

1
 

 

 

 
 

 

 

 
 


 
 

 

 


66

7

51

40
 

17

 

3
 

9

 

6
 

3

 

94

 


 

혜성이나 신성을 뜻함

 

대단히 밝은 별동별만을 기록한 것임

달이 5개의 행성인 수성 금성 화성 근처에 있는 경우

5개의 행성이 서로 접근해 있는 경우

5개의 행성중 어느 하나가 밝은 별 근처에 있는 경우

가장 밝은 금성 목성 토성이 낮에 보이는 경우

해나 달의 표면에 이상한 색깔이나 모양이 생기는 경우

지진을 비롯한 지각 현상을 뜻함
 

합계

60

49

65

120

2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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