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
- 백석
나는 고독과 나란히 걸어간다 휘파람 호이호이 불며 교외(郊外)로 풀밭길의 이슬을 찬다
문득 옛일이 생각키움은 ― 그 시절이 조아졌음이라 뒷산 솔밭 속의 늙은 무덤 하나 밤마다 우리를 맞아 주었지만 어떠냐!
그때 우리는 단 한 번도 무덤 속에 무엇이 묻혔는 가를 알려고 해 본 적도 느껴 본 적도 없었다 떡갈나무 숲에서 부엉이가 울어도 겁나지 않었다
그 무렵 나는 인생의 제1과(第一課)를 즐겁고 행복한 것으로 배웠다 나는 고독과 나란히 걸어간다 하늘 높이 단장(短杖) 홰홰 내두르며 교외(郊外) 풀밭길의 이슬을 찬다
그 날 밤 성좌(星座)도 곱거니와 개고리 소리 유난유난 하였다 우리는 아무런 경계도 필요없이 금(金)모래 구르는 청류수(淸流水)에 몸을 담갔다 별안간 뇌성벽력(雷聲霹靂)이 울부짖고 번개불이 어둠을 채질했다 다음 순간 나는 내가 몸에 피를 흘리며 발악했던 것을 깨달었도
내 주위에서 모든 것이 떠나 갔음을 알았다
그때 나는 인생의 제2과(第二課)를 슬픔과 고적(孤寂)과 애수(哀愁)를 배웠나니 나는 고독과 나란히 걸어간다 깃폭인양 옷자락 펄펄 날리며 교외 풀밭길의 이슬을 찬다
낙사랑(絡絲娘)의 잣는 실 가늘게 가늘게 풀린다 무엇이 나를 적막(寂寞)의 바다 한가운데로 떠박지른다 나는 속절없이 부서진 배(船) 쪼각인가?
나는 대고 밀린다 적막(寂寞)의 바다 그 끝으로 나는 바닷가 사장(沙場)으로 밀려 밀려 나가는 조개 껍질인가? 오! 하늘가에 홀로 팔장끼고 우―뚝 선 저―거무리는 그림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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